특별했던 성탄절 관측기
‘퍽.. 퍼버벅…’
급하게 전원선을 당겨보지만 이미 플라스틱 타는 냄새가 맴돌고 있습니다. USB 분배기 유전원이 필요로 하는 5V 전원 대신 태블릿 PC용 15V 전원을 연결한 것이죠. 항상 장비 세팅 완료 후 켰던 파워뱅크를 그날따라 왜 설치하는 도중에 켜야 했는지, 이런 상황을 방지하고자 연결잭에 꼬리표까지 붙이고 기역자와 일자형 잭으로 외관도 다르게 하여 5V와 15V를 구분했는데 왜 사전에 인지하지 못했는지 자책하면서 말이죠. 어둠이 일찍 찾아오는 눈 덮인 산지이기 때문에 붙여놓은 태그가 잘 안 보였다는 건 핑계에 불과했습니다. 급할수록 돌아가고 바쁠수록 천천히 하라는 말이 이토록 절절하게 폐부를 찌를 줄은 몰랐거든요.
가만히 화를 가라앉히고 생각해 봅니다. 물론 여분의 USB 허브 따위는 없습니다. 그럼 수리하거나 구입해야 하는데 멍하니 서있는 이곳은 성탄 전야의 강원도 어느 산자락입니다. 컴퓨터 전문점은 물론 USB 메모리를 판매하는 매장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손발은 점점 온기를 잃어가고 열정으로 채우고자 했던 겨울밤이 귀찮고 짜증 나는 훼방꾼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따뜻한 아랫목이 문득 뇌리를 스치며 ‘집에 갈까?’라는 말이 입가를 맴돌지요.
휴대전화 내비게이션 앱을 열어봅니다. 집까지 두 시간 조금 넘는 예상소요 시간이 나옵니다. 올해 마지막 월령 이어서 이대로 돌아가기 아쉬운 마음에 무심한 척 인근의 대형마트 경로를 검색해 봅니다. 가장 가까운 춘천 홈플러스까지 한 시간 남짓이면 도착할 수 있다고 하네요. 입가에 미소가 올라옵니다. 현재시간은 5시 15분, 펼쳤던 장비를 다시 접고 왕복 소요시간을 감안해도 8시 전에는 충분히 이 장소로 다시 올 수 있을 듯합니다. 물론 홈플러스 가전매장에 5V 전원으로 구동하는 USB 유전원 허브 재고가 있다는 가정하에 말이죠.
서둘러 장비를 정리하고 꼭 다시 돌아올 수 있기를 기원하며 결코 서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하지만 가속 페달에 자꾸 힘이 들어갑니다. 이십몇 년 전 ‘산은 거대한 물탱크’라는 한국지리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노면을 보니 역시 산에서 내려온 물이 갓길을 넘어 염화칼슘과 뒤섞여 도로변에 길게 얼어붙은 모습이 보입니다. ‘미끄러지면 큰일이겠구나’ 싶어 최대한 심호흡을 하며 안전하게 춘천으로 방향을 잡고 지방도를 벗어나 고속도로를 탑니다.
아직 고속도로 주행 중인데 도착 예정시간이 10분 밖에 안 남았습니다. 고속도로를 벗어나도 신호등이 있어 10분은 어려울 건데 네비가 잘못되었나 싶은 순간 고속도로가 끝나고 시내로 진입하자마자 좌회전 신호를 받으니 금방이네요. ‘침착하자 침착하자’를 되뇌며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주차장에 진입한 후 크리스마스이브날 기분 좋은 여유가 넘치는 가족들을 뒤로하고 지하 1층 가전 매장으로 내려가 원하는 제품을 스캔하기 시작합니다.
재고가 딱 하나 남아있던 태워버린 분배기와 같은 메이커의 유전원 USB 허브를 들고 계산대로 가서 차에 탄 과정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나름 침착하자 되뇌었지만 충분히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던지 에스컬레이터에서 갑자기 저를 보며 움찔하던 아주머니가 생각날 뿐입니다.
이미 천문박명은 지난 시각, 불야성의 도시를 벗어나 다시 어두운 관측지로 향합니다. 촬영을 할 수 있다는 설렘에 도착 후 장비를 설치하고 대상을 잡으니 긴장이 풀렸는지 몹시 허기집니다. 차갑게 식어버린 삼각김밥과 샌드위치를 먹고 보온병에 담긴 따뜻한 물 한잔에 잠깐 쉰다는 게 그대로 숙면으로 이어질 줄은 성탄절 아침 7시가 넘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촬영된 사진 몇 컷을 열어보니 별상이 마치 비둘기와 갈매기처럼 화면을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급하게 설치하면서 처음 담아보는 삼양 135 미리 렌즈 무게중심도 확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늦게나마 알 수 있었지요.
전원을 연결하기 전에 극성과 전압을 확인하는 과정은 이미 수십 번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본격적인 가이드 시스템을 구비한 지 4년여의 시간이 지나 알만큼 안다고 자부했지만 사소한 실수가 전체 시스템을 멈출 수 있고 ‘작은 구멍이 큰 둑을 무너뜨린다’는 말과 함께 우주왕복선을 잿더미로 만든 끊어진 오링(O-ring)이 생각나는 밤이었습니다. 주섬주섬 장비를 챙기다 관측지 맞은편 산 정상의 나무가 떠오르는 햇볕을 받아 붉게 타오르는 모습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문득 예전에 본 적 있는 고전 구절이 시나브로 떠올랐습니다.
‘사람이 산에 걸려 넘어지는 경우는 없다.
개미 언덕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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