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무진장' 관측지 탐방기
사방으로 시야가 트이고 적당한 해발고도를 확보하면서 주변에 인공조명이 없어 관측지로 적합한 곳 중 상당수는 이른바 ‘오지’(奧地)라고 불리는 지역입니다. 한국 남도의 오지는 크게 두 곳이 있는데 ‘BYC’라고 불리는 ‘봉화, 영양, 청송’과 ‘무진장’이라고 하는 ‘무주, 진안, 장수’가 있죠. 각각 경상도와 전라도의 낙후지역을 일컫는 말로 공통적으로 빠른 인구소멸과 낮은 재정자립도를 보이고 있는 고장입니다. 청송의 경우 기피시설인 ‘교도소’ 추가 유치에 군수 이하 전 군민이 사활을 걸고 있고 영양의 경우 격오지의 이점을 살려 국내 유일의 ‘국제밤하늘보호구역’을 조성하여 운영할 정도니까요.
7말 8초의 여름휴가를 맞아 찾아온 역대급 폭염 속에 평소에 궁금했던 관측지 현황도 알아볼 겸 남도 탐방을 계획하였습니다. 90년대 천문 잡지인 ‘월간 하늘’과 ‘별과 우주’에 소개되었던 지역부터 최근 인터넷 게시물과 수년간 위성사진으로 간추린 지역 몇 곳을 선정하였는데 그나마 ‘무진장’ 지역은 고속도로가 지나는 곳이어서 접근성이 괜찮은 편이지만 ‘BYC’ 지역은 청송 외에는 고속도로가 없는 고장입니다. 결코 짧은 시간에 다닐 곳이 아니라는 생각에 ‘BYC’ 지역은 차후를 기약하기로 하고 먼저 ‘무진장’ 지역을 돌아보았습니다.
인터넷 뉴스와 기사로만 접했던 인구소멸의 현장은 생각보다 더 심각했습니다. 읍내는 인적이 드물거나 거의 없어 동네 점방과 미용실 및 주유소는 이미 오래전에 문을 닫았더군요. 휴가철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없는 마을은 가로등이 사라지고 손님이 없는 읍내 또한 불이 일찍 꺼지고 있었습니다. 탐방 중, 물을 사기 위해 가까운 ‘하나로 마트’와 동네 ‘나들가게’를 찾아가 보니 해가 지기 전임에도 이미 문을 닫았거나 오래전에 폐쇄된 곳이었고, 편의점을 찾아 군청이 있는 곳까지 이십여 킬로미터를 달려가보니 외국인 점원이 유창한 한국어로 안부를 물으며 계산을 해주었으며 기름이 떨어져 주유를 위해 찾은 곳은 하루살이류의 날벌레가 터치스크린을 덮고 있어 수건으로 털어낸 후 사용해야 하는 ‘무인 셀프 주유기’가 반기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일부 관광지 숙박업소 주변과 휴게소 및 국립공원 구역에서 ‘불법’ 야영 중인 관광객을 제외하고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고 휴가철임에도 도로상황은 비교적 한가하였습니다. 단 가끔씩 마주치는 차량의 절반 이상은 상향등을 기본으로 켜고 운전하더군요. 연이어 마주 오는 상향등 차량에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연로하여 눈이 침침하신 분들이 선팅 된 차량으로 가로등도 없는 어두운 시골길을 다니려 하니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서울과 수도권 대도시의 교통정체와 불야성(不夜城)에 익숙한 도시인에게는 매우 낯선 경험이었습니다.
관측지 확인을 위해 찾은 지리산 자락의 휴게소와 주차장은 사유지이거나 LED 조명기구 및 전기차 충전시설이 있고 시야가 좋지 않은 곳이 많아 천체관측에 적합한 곳이 없었습니다. 매우 아쉽게도 90년대 초, 소형 굴절망원경으로 오리온 대성운의 붉은 기운을 관측했다고 하는 모 주차장은 읍내에도 드물던 24시 편의점 조명이 휘황찬란하게 비추는 곳으로 변해 있었고, 유료주차장 차단봉과 전기차 충전기에서 내뿜는 LED 조명 및 디스플레이 패널과 어우러진 캠핑카의 걸이식 외부조명은 이곳이 별지기와는 인연이 없는 곳임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차를 돌리기에 충분했지요. 지리산 서쪽 대부분의 주차장은 천체관측지로서 부적합한 곳이었습니다.
지리산 서쪽권역(전라남도 구례군)을 벗어나 함양과 장수 몇 곳을 둘러보았습니다. 수도권 및 강원도의 경우 어둡고 으슥한 곳은 영락없이 군부대가 위치한 곳인 반면 이곳은 군부대를 단 한 곳도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역사업 홍보 및 테마전시관 건물과 주차장 건설이 진행 중인 공사판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인구감소로 인한 지방 공동화(空洞化)로 세수(稅收)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고장에 지어지는 이런 건물은 거의 대부분 국민의 세금으로 지어지고 있지만 이미 지어진 수많은 지방 관광단지 및 테마공원, 지역 홍보관이 부실운영되거나 문을 닫고 있는 와중에도 단지 선거의 ‘표’를 얻기 위해 건설되는 조형물과 건물을 보고 있자니 속이 타들어가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대로 허탕인가 싶어 찾은 마지막 장소는 출입금지 표시가 없는 산자락에 조성된 포장된 장소였는데 진입로에 진출입 관리시설이 생기면 사용하지 못하는 곳이어서 (바리케이드 공사 중이더군요.) 차후를 약속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모로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극심한 피로누적으로 휴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장시간 운전에 지친 몸과 차량을 쉬며 하늘을 보니 벌써 동쪽 산 위로 ‘포말하우트’가 떠오르고 있더군요. 20분 내외의 짧지 않은 기다림이 끝나고 (혹시나 있을 수도 있는 ‘무인경비시설’에 탐지될 경우 출동요원과 조우하는 시간을 감안해야 합니다.) 장비를 펼친 해발 920m 지점에서 바라본 하늘은 습한 날씨에 수시로 물안개가 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진한 은하수를 보여주어 피로를 조금이나마 씻어주었습니다. 물안개는 자정 무렵에야 걷히기 시작하더군요. 대부분의 관측 후보지 상태가 좋지 않아 아쉬움이 가시지 않았지만 다행히 마지막에 남겨뒀던 장소에서 장비를 펼칠 수 있는 것도 행운이라는 생각에 깊고 조용한 밤을 누리며 만 이틀간의 ‘무진장’ 탐방을 마무리지었습니다.
P.S.
1. 야간 시골길에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입니다. 야간에 가로등 하나 없는 차도를(멀쩡한 인도를 두고) 걸어 다니거나 반사판 및 조명등 하나 붙어있지 않은 ‘전동보행기’를 타고 도로를 역주행하는 노인과 언제든 조우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운전대를 잡아야 하죠. 만에 하나 차량으로 인한 인사사고가 발생할 경우 귀책여부와 무관하게 지옥문을 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2. 어떠한 관측이나 촬영장비 없이 순수하게 맨눈으로 별이나 은하수를 보기 위해 어두운 곳을 찾는 사람이 부쩍 늘어나고 있습니다. 밤하늘을 보는 사람이 늘어나는 건 분명히 반가운 일이지만 뒤처리까지 깔끔한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은게 함정이네요. ‘꽁초’와 ‘쓰레기’ 및 ‘불필요한 소음’으로 다녀간 흔적을 남기는 분들과는 조우(遭遇)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렇게 어리지도 않은 것 같은데 은하수를 보는 남녀가 왜 '육두문자'를 주고 받는지 의문입니다.)
3.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을 보지 않은, 암순응(暗順應)이 끝난 상태에서 쭈그려 앉아 흰색 바탕의 검은색 숫자와 문자로 된 차량 번호판을 1미터 앞에서 보았을 때 읽기 어렵거나 거의 불가능한 조건이 ‘4등급’ 관측지(Rural / Suburban Transition)입니다. 황도광 관측을 노려봄직한 하늘의 마지노선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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