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별지기의 단상(斷想)
24년 4월 둘째 주말의 맑은 예보에 가슴 설레는 밤입니다. 산골 고지대를 찾아 밤하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단편적인 생각 몇 가지를 나열해 봅니다. 새로 밤하늘에 입문하시는 분들은 물론, 저보다 훨씬 오래 밤을 지새운 분들에게도 화두를 던질 수 있겠구나 싶네요. 진지하거나 심각할 필요 없이 ‘저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구나’ 정도로 편하게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1. 밤하늘을 맞이하기 위해 집에서 출발하기 전
이십여 년 전, 어느 원로 별지기의 말씀이 아직 귓가에 남아있습니다. ‘아마추어 천문가 한 명이 탄생하기까지 수많은 반대가 있기 마련이다.’ 그만큼 남들이 자는 밤시간에 인적이 드물고 낯선 장소로 들어가 밤을 보내는 취미를 환영하는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훨씬 많다는 뜻이죠. 낯선 곳으로 어두움을 찾아 떠나는 여정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가족구성원의 동의와 격려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타의에 의해 아주 빠르고 신속하게 이 취미를 접게 될 것입니다.
2. (아무도 말하지 않는) 사람에 따른 관측지 고르는 법
관측지를 찾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은 과거에 적어놓은 노트로 대신해 봅니다.
‘천체관측을 위한 밤은 ‘음’이다. ‘음’이라는 것은 매우 정적이며 조용하고 아래로 가라앉는 성분으로 무겁고 탁한 특성이 있다. 행동이 가벼우면서 말이 많아 시끄럽고 감정기복이 표정에 그대로 나타나는 맑은 사람은 밤하늘과 정반대의 특성을 가진 ‘양’의 사람이다. ‘양’의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는 1급 관측지보다 ‘음’의 사람만 가득한 3급 관측지가 별 보기에 ‘훨씬’ 좋다.’
‘밤새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 줄담배를 태우는 사람, 통화내용을 주변의 모든 사람과 공유하는 사람, 쉴사이 없이 장비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부산스러운 사람, 큰 동작과 불필요하게 급한 움직임으로 시선을 끄는 사람, 웃고 있다가 어느 순간 투덜거리고 있는 사람이 있는 관측지는 가고 싶지 않다.'
3. 관측지 가는 당일이나 전날 오후 식사
관측지를 찾아 떠나는 장거리 운전을 위해 음주는 물론 맵거나 짠 음식은 피해야 합니다. 장에 탈이 나면 별이고 나발이고 집에 가고 싶은 생각뿐이지요. 고단백 식사는 화장실에 자주 가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이 있습니다. 화장실을 찾기 어렵거나 불가능한 고소작업자나 U-2나 SR-71 같은 장거리 고고도 정찰기 파일럿들이 애용하는 방법입니다. 공중화장실이 없는 일부 관측지의 경우 인근의 휴게소나 가까운 읍내에서 볼일을 전부 해결한 후 관측지로 향해야 합니다. 관측지에서의 작은 볼일은 전용 ‘기구’를 사용해도 되지만 취급이 힘들기 때문에 권장하기는 어렵네요.
4. 관측지 가는 길 위에서
관측지로 찾는 강원도의 산을 보면 항상 생각나는 노래가 있습니다.
‘난 한 번쯤은 저 산을 넘고 싶었어
그 위에 서면 모든 게 보일 줄 알았었지
하지만 난 별다른 이유 없어
그저 걷고 있는 거지
해는 이제 곧 저물 테고
꽃다발 가득한 세상의 환상도
오래전 버렸으니
또 가끔씩은 굴러 떨어지기도 하겠지만
중요한 건 난 아직 이렇게 걷고 있어.’
‘그저 걷고 있는 거지’ - 故 신해철 (Main theme from Jungle Story-part 3)
https://youtu.be/ZS45UBv70-s?si=V4mNYaIIY0AcMdS8
5.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오는 시간
‘양’이 ‘음’으로 바뀌는 시간은 ‘동(dynamic)’이 ‘정(static)’으로, 소리(sound)는 정적(silence)으로, 빛(light)은 어둠(dark) 속으로 감춰야 하는 시간입니다. 천체사진을 준비한다면 장비설치 및 전원연결에 항상 주의해야 하죠. 예를 들어보면 파워뱅크 전원을 켜기 전 전원케이블 연결 상태 및 적정 전압여부의 확인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극축정렬 후에는 망원경 및 적도의에 어떠한 물리적인 접촉도 피해야 하기 때문에 반사망원경 광축이나 적도의와 장비의 무게중심 및 전선 걸림 여부 등을 꼼꼼하게 확인해야 스트레스 없는 촬영이 가능합니다.
6. 깊어가는 밤하늘의 별을 보며
장비구동을 시작하며 눈이나 쌍안경 또는 파인더를 통해 밤하늘을 볼 때마다 거의 항상 머릿속에 떠오르는 문구 하나 소개합니다.
‘당신 발을 내려다보지 말고, 고개를 들어 별을 바라보라.’
2012 런던 페럴림픽 개막식에서 - 故 스티븐 호킹
7. 밤하늘을 찾는 이유
밤하늘을 찾는 이유에 대한 제 생각은 과거에 적어놓은 노트로 대신해 봅니다.
‘별 보는 취미가 왜 좋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다. ‘천체사진을 잘 찍고 싶어서?’ ‘더 큰 망원경으로 남보다 많은 심우주 천체를 보고 싶어서?’ 결코 그렇지 않다. 별을 보는 사람에게만 허락된 유일한 여행인 ‘시간여행’을 가장 편하게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천체망원경으로 보거나 카메라로 촬영하고 있는 메시에 목록 31번 안드로메다 은하의 빛은 250만 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남방사람원숭이)라 불리는 최초로 이족보행이 가능했던 유인원이 나무에서 내려온 시기에 출발한 빛이고 1,344광년 떨어진 M42 오리온 대성운은 서기 680년, 신라의 김유신과 백제의 계백이 국운을 걸고 황산벌에서 자웅을 겨루었던 해에 출발한 빛이다.
3차원을 넘는, 시공간이 포함된 4차원의 개념을 어렴풋이나마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는 별지기는 외계인과 인간의 조우가 얼마나 어렵고 희박한 확률인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이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해상도를 한 차원 높이는 업스케일링(Upscaling) 방법 중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8. 별이 빛을 잃어가는 새벽녘
천체관측은 다녀간 자리에 발자국 외에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아야 하는 자연과학 취미활동입니다. 장비를 차에 갈무리하고 시동을 걸기 전, 휴대전화 조명으로 사방을 확인하여 낙하물 확인 및 회수까지 완료해야 멋진 별지기라고 할 수 있지요.
9. 관측지에서 맞이하는 아침
주변정리를 마친 후 맞이하는 상쾌한 새벽공기와 귀를 간지럽히는 새소리는 돈주고도 구할 수 없는, 밤을 지새운 별지기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도시의 먼지와 소음으로 오염된 여러분의 폐와 귀를 충분히 씻고 밤의 찌뿌둥함을 아침의 신선한 냉기로 환기하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아침의 상쾌함을 더하기 위해 세면을 위한 물과 양치도구 및 깨끗한 수건을 항상 구비하고 다닙니다. 요즘같이 추위가 한풀 꺾인 봄부터 가을 시즌에는 머리까지 감으면 상쾌함이 배가 되지요. 겨울철에는 얼굴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며 정신이 번쩍 들기 때문에 졸음운전이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어 더 좋습니다.
귀갓길에는 항상 안전운전에 주의해야 하며 조금이라도 졸음이 찾아오면 지체하지 말고 바로 가깝고 안전한 곳에 차를 정차한 후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모든 별지기분들의 즐겁고 안전한 관측이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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