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마우스와 버니부츠 이야기
사방이 적으로 포위된 절체절명의 전쟁터! 그곳은 낮에도 영하 20도, 밤에는 무려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1,000미터 고지에 차가운 산정호수의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냉기를 뿜어내는 곳이었습니다. 얼마나 추운지 비행기로 투하된 보급품은 군수품이건 식료품이건 가리지 않고 낙하와 동시에 반 정도는 깨져버렸으며 윤활유가 얼어붙는걸 방지하기 위해 차량은 주기적으로 시동을 걸어놓아야 했고 총기는 지속적으로 격발을 해야 사용가능하였으며 과반수의 인원이 손,발의 동상으로 고생하던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장 중 하나였죠. 몇 배의 적 만큼이나 무서운 추위를 이기며 필사의 후퇴를 감행해야 했던 그곳은 2차대전 시베리아나 북유럽의 어느 곳이 아닌 바로 1950년 11월 말, 함경남도 ‘삼수갑산’의 장진호(長津湖, Lake Chosin) 였습니다.
추위로 인한 피해는 적이나 아군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2차대전부터 험지만을 골라다닌 최정예 미 해병대 1사단이 동상으로 3,500명이 넘는 비전투손실을 기록할 정도였죠. 생존자들은 탄환이 스쳐 피가 흘렀는데 추위로 얼어서 저절로 지혈이 되어 그대로 잠들었다고 증언하고 있고, 미군을 저지하기 위해 야간 돌격을 감행하던 중대단위의 중공군은 곧이어 날아온 기관총 세례를 피해 잠시 눈밭에 엎드려 있다가 그대로 중대전체가 동사해버린 기록이 있을 정도이니 감히 상상하지 못할만큼 혹독한 조건이였음이 분명합니다.
추위와 눈과 얼음으로부터 군인의 발을 보호하기 위한 방한화는 이미 2차대전 이후 개발이 진행되어 보급중 이였습니다. 최대 1인치의 양모를 공기층을 포함한 내유/디젤 내성의 이음매 없는 2중의 고무외피로 완전히 밀폐시켜 보온병 플라스크와 유사한 완전방수 및 냉기침투방지 구조의 신발이 그것이죠. 정식명칭은 ECVB (Extreme Cold Vapor Barrier Boots) 이지만, 특유의 불룩한 외모로 인해 ‘미키마우스 부츠’라는 애칭이 붙었습니다. Type 1은 영하 29도(-20°F)의 혹한에도 발의 온기를 빼앗기지 않도록 설계되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전쟁의 장진호 전투는 이런 설계를 초월한 전장이였습니다. 영하 30도를 밑도는 밤에는 미키마우스 부츠를 착용한 병사에게조차 동상이 발생되었다는 보고를 접한 군은 곧바로 Type 2 개발을 시작합니다. 신형은 설상에 맞게 흰색 외관에 보온재를 보강하여 영하 51도(-60°F) 까지 발을 보호할 수 있었으며 토끼발을 연상케 한다고 하여 ‘버니부츠’ 라 불리며 군에 보급되었죠.
미키마우스와 버니부츠는 군수 잉여품 판매로 시장에 대량으로 보급되었고 이른바 가성비가 훌륭한 제품이라는 평가와 함께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70년대 이후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신소재 개발과 최신 제조공법으로 영하 100도의 혹한에도 온기를 유지하는 첨단제품이 나와있지만, 2000년대 기준 중고품 50달러 내외(버니 부츠는 조금 더 나갑니다.) 의 저렴한 가격과 군용제품 특유의 탁월한 신뢰성으로 현재에도 널리 애용되고 있습니다.
개발된지 50년이 넘은 물건인만큼 단점또한 적지 않은데 가장 큰 이슈는 발이 전혀 숨을 쉬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통기성이 거의 없는 제품이여서 장거리 행군은 불가하였고 영하 10도 이상의 온도에서는 발에 땀이 차는 관계로 자주 양말을 갈아신어주지 않으면 참호족 (Trench Foot) 발병 위험이 커 정작 군에서는 사용이 크게 제한된 제품이였다고 하네요. 6.25 전쟁당시에도 이른바 ‘발 건조 텐트’를 설치해서 정기적으로 신발을 벗고 발을 말리도록 했다고 합니다. 뒷마당 눈치우기나 빙판길 제설같은 가벼운 활동이나 낚시같이 걸을 일이 별로 없는 활동에 한하여 최고의 가성비를 갖춘 제품인 셈입니다. 저는 밤하늘 천체관측용으로 사용중인데 역시 걸을일이 거의 없기에 가능한 조건입니다.
미국의 저명한 모터사이클 저널리스트인 피터 이건 (Peter Egan, 1948~) 은 추운 위스콘신에서 오토바이 탈때 발이 시려워 고역이니 남부로 이사가고 싶다고 하자 독자가 추천해준 신발이 바로 이 제품이라고 합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후기를 살펴보면
‘이 부츠는 당신의 활동을 따뜻하게 바꿔줄 것이다’
‘내가 살아오면서 확신하는게 별로 없는데 이 신발을 신으면 발이 따뜻하다는 것만은 확신한다’
‘당신의 활동이 낚시대 주변으로 한정된다면 이것은 완벽한 부츠임’
ㄴ 맞아! 정적인 낚시라면 더 나은 가치를 찾을 수 없을 걸’
‘나는 영하 35도 아래에서 정기적으로 착용하고 한번도 발이 시려운 적이 없었어’
‘약 12년전이나 6년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이 신발을 신는다. 겨울부츠 구매기록이 없다…’
‘내가 87년인가 88년인가에 한 켤레 샀는데, 이 신발보다 내가 빨리 닳아 없어질 것이 확실함’
‘100달러가 넘는 좋은 부츠는 많지만 50달러 가치의 부츠는 이게 유일하다.’
물론 조심해야 할 점도 잊지 않습니다. 통풍이 불가하고 발의 여유가 거의 없는 제품이여서 이런말도 하더군요.
‘노스 다코타의 영하 38도의 날씨에도 따뜻함을 유지하지만 산책하고 싶은 생각은 없음’
‘얼음낚시에 사용한다. 면양말은 절대 안되고 모양말을 신어라’
19년 현재 인터넷 온라인 마켓에는 매물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부 밀리터리 취급점이나 동호회에 가끔 올라왔었는데 진작에 단종된 물건이다보니 추가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아 사장되는 느낌이네요. 버핀이나 소렐같은 고급 기능성 방한화가 일상화된 21세기여서 수요가 거의 없겠다는 느낌도 듭니다.
이십대 초중반의 젊은이들이 이역만리 타지에 와서 누군지도 모르는 동맹을 위해 값비싼 희생을 치른 혹독한 결과로 탄생한 부츠를 신어보며 잠시 숙연한 기분을 느껴보는 밤입니다. 물론 숭고한 희생은 잊혀져서는 안된다는 이른바 ‘We will never forget your sacrifice’ 마음이지요.
출처 :
https://colemans.com/surplus-guide/post/history-of-mickey-mouse-boots
http://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044&num=124924
https://en.wikipedia.org/wiki/Bunny_boots
https://ppss.kr/archives/35076
https://www.ar15.com/forums/general/How_warm_are_mickey_mouse_bunny_boots__Ice_Fishing/5-1571047/
기타 여러 인터넷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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